밭밑에는 축구공이 있고,
손끝에는 책이 있잖아요.
행복은 이러게나 단순한 거예요.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손웅정, 난다

마흔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 ‘어른’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나를 생각해 보면 솔직히 아니다고 대답한다.
어른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어른: 1.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2. 한집안이나 마을 따위의 집단에서 나이가 많고 경륜이 많아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만 18세가 되면 성인이 된다. 그러니, 나는 분명 정의 1에 따라서 다 자란 사람. 즉 어른이다.
하지만, 사전적 정의 2에 따르는 경륜이 많아 존경을 받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을까? 나를 비롯해서 성인이 되었지만,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내게도 어른이 필요할 때가 많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되어서도 아직 미숙한 점이 많고, 살면서 맞닥뜨리는 인생의 과제들에도 머리를 긁적이며 안절부절못할 때가 많다.
곁에 ’ 어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가 참 많다.
내게는 손웅정 작가님이 어른이다. 긴 세월 자신이 해왔던 일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신념이 있기에 그는 언제난 촌철살인의 말과 행동들로 존경을 받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굵고 단단한 심지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늘 궁금했었다. 그와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손웅정 작가님을 이룬 것들은 30여 년간 치열하게 읽고 쓰고, 내 것이 되도록 애쓰면 노력한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는 난다출판사 대표 김민정 님과 손웅정 님의 대담집이다.
손웅정 작가님이 손흥민 선수와 독일, 영국의 해외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읽고 필기를 했던 그의 독서노트의 기록들을 토대로 그의 삶의 대한 질문과 생각에 대한 질문들이 펼쳐진다.

30년을 치열하게 읽고 15년을 독서노트를 써온 작가님은 한국에서 해외로 출국할 때마다 책을 이삼십 권씩 챙겨나가셨다고 한다. 좋은 책은 두 번 세 번씩 읽으며 역사공부, 인물 탐구, 온갖 상식, 숨은 이야기까지 노트에 가득 써내려 갔고, 자신의 삶에 깊이 박아 두었다.
독서를 통해 그는 코치로서 부모로서 손웅정이라는 한 사람의 성장과 기반을 이루어왔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는 분명 어른을 만났고, 어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에 가슴이 벅찼다.

p. 34 사람이 나이 먹는다고 절로 고생해질 수 없어요. 배움이라는 마찰 없이는 품격도 만들어질 수 없어요. 독서의 정의가 뭐예요. 새로운 사실을 알거나 지식 흡수를 위한 행위란 말이에요.
흡수라니까요. 배출이 아니라니까요. 흔히 독서를 콩나물 기르는 것에 비유하고는 하죠. 콩나물에 물 줘봐서 아시겠지만 콩나물에 물 주면 아래로 다 흘러내리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콩나물아 잘 자라라 계속 물을 주잖아요.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보면 콩나물 키가 길쭉길쭉 자라 있거든요.
보통 세상을 여행하듯 살라고 하잖아요. 안 가보면 절대 알 수가 없다고들 하잖아요. 책이라고 다를까요. 안 읽고 어떻게 알겠어요. 내가 살면서도 내가 사는 데를 모른다? 이건 그냥
생존의 문제인 거예요.

p. 66 저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의 유연성도 크게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할 덕목이라고 봐요. 유연성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바로 결단력과 속도지요.
유연성은 부러지는 게 아니라 휘는 생각이잖아요. 어떤 상황에서든 옭고 빠른 대응을 해내는 것이 품격 있는 어른의 지혜라 할 때 그 속도의 관건은 역시나 심플한 환경에 있다고 봐요.
단순할수록 속도전에서 이길 확률이 높으니까요.
p. 104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하루하루 무언가를 더하고,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하루하루 무언가를 버리라고 그랬어요. 지식은 내가 무엇을 배우느냐에 목적이 있고, 지혜는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관점이 있잖아요. 지식이나 지혜가 더해질 때 내가 얻는 게 많아 보이지만 이 가운데 버려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안다는 얘기도 되거든요.
최고의 음식이 소식인 것처럼요.
손웅정 작가님은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가 자녀를 양육한 부모의 자세는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내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나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아이로 인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고, 아이를 보며 나의 부족했던 모습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나를 서서히 변화시키고 아이가 성장함과 동시에 나를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아이는 늘 나의 스승이 되어주었고, 아이의 단순하고 직관적 관점이 세상을 복잡하게 보고 조금 버거워하는 내게 명료한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p. 140 흥민이 독일어 수업받는 동안 걔 뒤에 일단 제가 앉아 있기 시작했어요, 저요? 에이 그렇게 듣는다고 해서 내공부가 아닌데 어떻게 제 독일어가 늘겠어요.
저는 오로지 흥민이 졸린 것에만 온 신경이 곤두섰지요. 제가 두 눈 부릅뜨고 뒤에서 보고 있는데도 갑자기 깜빡, 하고 애가 졸아요. 그럼 제가 또 발로 툭 치고. 그때는 그렇게
둘이 한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낸 것이 무슨 별일이나 될까 싶었는데 시간이 한참 흘러 생각을 생각을 해보니까요, 저도 그땐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잖아요.
돌이켜보니까 둘이 함께 성장을 했던 시간이 아니었나 싶더라고요. 흥민이가 독일어를 배울 때, 저는 흥민이가 독일어를 배우던 그 시간, 그 경험까지 함께 배운 거잖아요.
손웅정 작가님이 살아온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질문을 던진다. 책을 놓지 않고 치열하게 배우고 채우는 삶, 그리고 채워진 지혜를 미래의 세대들을 위해 쓰고, 전하는 비우는 삶.
책을 읽는 내내 손웅정 작가님의 목소리가 육성으로 들리는 기분이었다. 대담집 형식이라 질문을 따라 생각하고, 또 그 대답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이들을
책으로나마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벅찼다.
살면서 혼란스럽고 어려운 일 투성이지만, 이런 어른이 곁에 있다면 세상을 마주할 배짱이 조금 더 두둑해질 것 같다.
어른이 되어도 어른이란 어떤 것인지 고민이 많은 사람, 지금 곁에서 힘이 되고 인생의 힌트가 필요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님과 마주 앉아 있는 것만 같은 경험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손웅정 작가님 독서 노트의 한 구절을 전하고 싶다.
내 몸이 반듯한데
내 그림자가 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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