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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하는 힘을 키우는 중입니다(책리뷰)

최고의 sf단편소설집 <종이동물원>켄리우,장성주 옮김, 황금가지 : 인생에 대한 종합선물 세트같은 이야기

by rallalawoman 2024.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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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연약하지 않고, 누가 부정한다고 해서 훼손되지도 않습니다.
진실은 아무도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숨을 거둡니다.
<역사의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에서

&amp;lt;종이동물원&amp;gt; 켄리우, 황금가지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사랑, 모험 이야기, 환상, 역사, 과학, 철학 그리고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이야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쌓여가다 보면 나라는 사람의 취향이 되어간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모아 살아간다.
각자의 취향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기에 책 선물은 가장 어려운 선물이 된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상대방이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 장르일 수도 있고,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편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켄리우의 소설집 <종이동물원>은 이 모든 고민에서 자유로운 이야기 종합선물세트이다.
이 소설집은 이민자의 삶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그리고 역사에 대한 고찰등 작가의 삶의 경험들과 고민들이 얼마나 깊고 폭넓은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다. SF소설이지만 안드로메다에서 온 것과 같은 이야기들이 아닌 나와 내 어머니의 이야기, 내가 자란 민족의 이야기, 미래사회의 이야기로 어렵지 않게 공감하고 상상하며 따라 읽어갈 수 있는 소설집이다.



나한테 마침내 이야기할 사람이 생긴 거야. 나는 말이지, 너한테 내 언어를 가르치면, 내가 한때 사랑했지만 잃어버렸던 것들을 작게나마 다시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네가 처음 나한테 말을 했을 때, 우리 어머니랑 나랑 똑같은 억양의 중국어로 말을 했을 때, 난 한참 동안 울었단다. 너한테 처음으로 종이 동물을 접어 줬을 때, 그래서 네가 웃었을 때, 난 세상 모든 걱정이 사라진 것만 같았어. - <종이 동물원>, 켄 리우 - 밀리의 서재

표제작 <종이동물원>은 중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소년의 이야기이다. 소년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준 종이 동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성장한다. 여기에서 특별한 점은 이 종이 동물들이 살아있는 동물처럼 움직이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종이동물들을 살게 만드는 마법은 바로 소년의 어머니의 숨이다. 자신의 언어를 잃고,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난관과 외로움이 한 소년의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오직 자신의 아들이 세상의 전부였던 어머니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슬프고 아련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로 켄리우는 휴고상, 세계환상문학상, 네뷸러상의 3관왕이 된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독자들은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릴 것이다.

그 밖에도 켄리우는 <종이동물원>외 13편의 전혀 다른 이야기들로 독자들은 놀라게 만들고, 흥분하게 만든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돕는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기계가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을 한다, 이겁니다.”
- <종이 동물원> ‘천생연분’ 중에서  - 밀리의 서재


<천생연분>은 AI로 우리의 삶과 취향 그리고 모든 정보가 통제되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성을 매칭시켜 주고, 어떤 데이스 코스가 높은 만족감을 주는지, 오늘 나의 기분에는 어떤 음악이 적절한지, 나의 신체리듬은 어떤 상태인지 나의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여 최적화시키는 인공지능의 프로그램에 의해 살아가는 모습들을 묘사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지만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했을 때 기술은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일본’이나 ‘중국’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그건 그저 낱말일 뿐, 지어낸 것일세. 일본 사람 한 개인이 위대할 수는 있겠지. 중국 사람 한 개인이 뭔가 바랄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이 무언가 바라고, 믿고, 받아들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나라 이름 같은 건 다 공허한 낱말일세. 신화일 뿐이야. 그런데 그 신화에는 강력한 마법이 깃들어 있어서 희생을 강요하지. 사람을 양처럼 살육하라고 강요하는 거야. - <종이 동물원>  ‘파자점술사’중에서, 켄 리우 - 밀리의 서재


무리’를 뜻하는 ‘군’이라는 한자는 왼쪽에 ‘귀한 사람’이라는 뜻의 글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양’이 있네. 군중이란 바로 그런 걸세, 자신들이 고귀한 대의를 수행한다고 믿고 늑대 무리로 변신한 양 떼인 거야.
- <종이 동물원>, ‘파자점술사’ 중 켄 리우 - 밀리의 서재

<파자점술사>는 대만 2.28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우리나라의 제주 4.3 사건과 닮은 이 사건은 국가가 개인에게 행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내용 중 “인간은 신과 국가와 기업에 대한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 사회의 근간이자 삶에 의미를 주는 원천이 된다. 그 이야기를 위해 우리는 기꺼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또는 죽임을 당한다” 는 <파자점술사>의 간 선생님의 생각과 맞닿아있다. 국가, 문화, 민주주의, 공산주의 등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질서이다.

국가는 ‘우리’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잔인하게 폭력적이다. 사상과 체제의 차이라는 신화로 인해 개인의 삶을 무참히 짓밟고 짓이겨버린다. 이 소설은 이렇게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저는 그러한 행위를 반인륜 범죄가 아닌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부정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금껏 731부대가 한 짓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일본이 전쟁 당시에 저지른 잔학 행위의 증거들이 하나둘 세상에 공개되었지만, 일본 정부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 <종이 동물원>‘역사의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 켄 리우 - 밀리의 서재

과거에 떠난 희생자들의 침묵은 그들의 목소리를 복원할 의무를 현재에 부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무를 기꺼이 떠맡을 때 비로소 더없이 자유로워집니다.
- <종이 동물원>‘역사의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중, 켄 리우 - 밀리의 서재


<역사의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은 이 소설집의 마지막 14번째의 이야기이다. 켄리우 작가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가장 아끼는 소설이자, 동북아 아시아에서의 가장 논란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중국에서는 일부 내용이 삭제가 되어 출판되었고, 일본에서는 금서로 지정되어 있다.
이 소설은 다큐형식으로 서술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과 입장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731부대의 반인륜적인 생체실험의 묘사와 위안부 이야기,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이 과거의 역사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진실을 마주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고통스러웠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피엔스는 인간을 본능적으로 ‘우리’와 ‘그들’의 두부류로 나눈다. 우리란 너와 나, 언어와 종교관습이 같은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사피엔스, 유발하라리>
이러한 인간의 특성 때문일까? 인간은 국가라는 이름으로 사상이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킨다. ‘그들’에 대해서는 수많은 동물들을 멸종시킨 사피엔스의 역사처럼 인간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이 소설은 우리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과거의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들으려고 해야만 한다고 한다. ‘진실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숨을 거둔다’로 말한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때 ‘역사의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이 된다.
지나간 일로 덮어버리고, 잊어버릴 때 우리는 이 비극을 또 반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종이동물원>은 영어로 쓰인 소설이다. 그리고 전 세계의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종이동물원>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가 수십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에 읽히고 있는 것과 같은 중요한 이유이다. 바로 우리의 역사, 진실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을 때,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귀한 작품들로 인해 우리는 과거의 목소리를 복원할 의지를 갖게 되고,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과거과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지는 우리의 이야기는 어느 한 시기를 잘라내어 살아갈 수 없다.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는 역사라는 한 줄에 각각의 의미를 담은 구슬로 꿰어지는 것이다. <종이동물원>은 개인의 삶, 미래의 삶, 기술에 전복되는 삶의 경고, 그리고 과거의 역사까지 모든 이야기들을 잘 버무려 소복이 한 그릇에 담아두었다. 이 맛있는 한 그릇의 소설을 경험하는 순간, 우리의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질 것임이 분명하다.


종이 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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